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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개혁 아니라 혁명, 그것도 사악한 혁명
"한국 민주주의 위협..친문 세력의 軟性 레닌주의"

송평인 논설위원  입력 2020-11-04 03:00수정 2020-11-04 03:00

민주주의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어… 트럼프 파시즘에 미국도 위협받아
한국에서 민주주의 위협하는 건 친문 세력의 軟性 레닌주의
공수처, 한국판 체카 될 수도

도널드 트럼프가 4년 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미국인이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가 파시즘이었다. 3일(현지 시간)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할 위기에 처한 트럼프는 극우 무장 세력에게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대선 개표가 연장되는 경우 ‘물리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에서조차 이런 대통령이 나와 적지 않은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정치에서 사악한 권력 의지를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때에 민주화가 뜻하는 바로 그 정치적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혹자는 친문 세력의 행태를 연성 파시즘이라고 부르며 우려한다. 그러나 그 행태는 미국과 달리 우파 파시즘보다는 좌파 레닌주의(Leninism)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연성 레닌주의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옛 소련이 선전했듯 대중이 봉기한 ‘영광스러운 혁명’이 아니라 볼셰비키의 군사 쿠데타였다. 레닌은 쿠데타 전만 하더라도 검열을 비판하고 언론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가 쿠데타 이튿날 첫 번째로 내린 조치는 1위 신문인 ‘볼랴 나로다’ 폐쇄였다. 친구인 막심 고리키의 신문과 그가 쓰는 ‘반시대적 생각’이란 칼럼만은 한동안 허용됐지만 그마저도 이듬해 여름 없애버렸다.  

언론장악만큼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독재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형사사법체제의 장악이었다. 12월 레닌은 비밀포고령으로 체카를 설립했다. KGB의 전신인 체카(Cheka)는 검찰과 경찰에서 벗어난 특별 수사·기소 기관이었다. 체카의 자의적 수사와 기소로 반혁명분자로 지목된 자들은 사소한 트집을 잡혀 감옥에 가고 볼셰비키들은 죄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특권계급으로 탄생했다.

우리나라의 공수처는 공산권 국가를 빼고는 유례를 찾기 힘든 수사·기소기관이다. 지금 공수처 추진과 함께 검찰의 기능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검찰총장과 그 측근들만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평검사들마저 반발하고 나왔다. 평검사 전체의 15%가량이 자기 이름을 걸고 반발할 정도이면 나머지 침묵하는 검사 대부분도 반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반발하는 검사의 수가 얼마가 되든 다 잘라버리면 그만이라는 집권세력의 발상은 검찰을 개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검찰을 혁명하겠다는 것이다.

친문 세력에게 이 혁명이란 용어가 특별히 거부감을 갖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꼭 해야 할 혁명으로 여길 수 있다. 정작 한심한 쪽은 공수처를 단지 비판의 여지가 있는 입법의 하나로 보는 흐리멍덩한 보수세력이다. 공수처 추진과 검찰에 대한 공격은 대한민국의 대체로 성공한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폄훼한 세력이 이제 역사를 넘어 구체적 제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공수처는 그 자체로 위험한 조직이지만 야당이 공수처장 추천에 비토권을 갖고 있는 지금은 아직 그 위험성이 현실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야가 공수처장 추천에 대한 합의에 실패하고 집권세력이 법을 바꿔 야당의 비토권을 없애버리고 일방적으로 임명을 강행하는 순간 그것은 한국판 체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대법원이 법치의 최후 보루 역할을 수행한다면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다. 그러나 김명수 대법원은 법치의 최후 보루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얼마 전 대법원의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판결은 취소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별게 아니다. 그러나 취소 판결에 이르는 논리가 헌법과 법률이 허용한 범위를 넘어섰다. 막연한 정의감이 헌법보다 상위에 있었다. 파슈카니스 등 소련 법학자들이 주장하던 ‘혁명적 정의’를 떠올리게 하는 위험한 판결이다.

러시아 인민들에게 볼셰비키 혁명은 일으킨 게 아니라 당한 것이다. 그들이 당한 줄도 모르게 당한 혁명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우리도 지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혁명을 당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혁명인 줄도 모르는 것일 수 있다. 그건 개혁이 아니라 사악한 혁명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다. 미국도 한국도 방심하지 않고 깨어서 행동하는 국민만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2020-11-08 10: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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