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悲運의 越南敗亡史가 한반도에 주는 교훈
[ 2016-12-28 06:58:09 ]
작성자
자유연합
조회수: 3091        

비운(悲運)의 월남패망사—한반도에 주는 교훈(1)

홍관희 (고려대 교수)

1 월남 패망에서 교훈 찾아야 할 한반도 정세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월맹)과 베트콩(남베트남 내 월맹 지지 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남베트남(월남)과 그 동맹국인 미국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무장투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그 기원이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로 호지명(胡志明, 호치민)이 북베트남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제적으로 냉전이 무르익던 1954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인 5만 8천명을 포함해 3백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고 이중 절반 이상이 민간 베트남인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개입이 절정에 이르렀던 1969년에 약 50만 명의 미군이 전쟁에 참가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급속히 증가된 반전(反戰) 여론으로 미국이 분열된 가운데, 1968년 말 당선된 닉슨 대통령은 1973년 1월 월맹과의 비밀 평화협정 끝에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명령하였다. 그 후 2년 후인 1975년 월맹 공산군은 월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무력 점령하였고 베트남 전쟁은 막을 내렸다. 남베트남은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베트남은 적화 통일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반도에 주는 시사(示唆)와 교훈은 의미심장하다. 1950년 대 냉전을 배경으로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싸움이었던 동시에 월맹의 집요한 전쟁 의지와 월남의 내부 분열·부패로 인해, 미국의 강력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공산 월맹의 승리로 종결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 월맹의 완강한 전쟁 의지에 ‘현실주의’로 선회하면서 마침내 동맹을 포기하고 패배를 감수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무력통일 기도를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은 북한에 맞서 우리는 자체 국방력과 주한미군의 결합체인 한미연합방위력으로 억지력을 구축해 가까스로 평화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최근 핵·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여 남북한 군사 균형이 붕괴됨으로써, 한반도 안보정세는 심각한 위기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한국의 국내 정치정세는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고, 우방국 미국에서는 45대 대통령에 트럼프 후보가 선출됨으로써 고립주의로의 회귀 가능성이 점쳐지며, 대외정책이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미국 내에서 북핵 타결을 위해 ‘선제공격’과 ‘직접협상’이라는 극단적인 방책까지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새삼 월남 패망사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결코 남의 일로만 볼 수 없을 만큼 베트남과 한반도 간 안보상황의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현명함이 절실해지는 시점이다.

2. 베트남 전쟁의 기원

베트남은 19세기 이래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젊은 시절 ‘조국과의 결혼’을 위해 약혼자를 버리고 프랑스로 건너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호지명은 귀국해 ‘베트남 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일본군 및 프랑스군과 싸웠고, 2차 대전이 끝나자 하노이 북부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2차 대전 후 식민지 복원을 꾀하던 프랑스는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바오다이를 앞세워 1949년 7월 사이공을 수도로 하는 남베트남을 수립하였다. 프랑스와 호지명 측 간 무장투쟁이 지속되던 중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지압이 이끄는 월맹군이 대승함으로써 프랑스는 패퇴하였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호지명이 통치하는 월맹과 바오다이가 지배하는 월남으로 분할되었다. 1955년 월남에서는 강력한 반공 성향의 고딘 디엠 정권이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베트남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냉전이 심화되던 1950년대 중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월남의 고딘 디엠 정권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다짐하였다. 이즈음 월남 내에서는 북부의 월맹을 지지하는 ‘베트콩(Vietnam Communist)’과 디엠 정권 간 무장 투쟁이 빈번히 전개되었다. 베트콩은 월남 내 공산·비공산 세력을 규합해 ‘민족해방전선(NLF)’을 결성하여 디엠 정권에 대항하였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베트콩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월남 정부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경제·기술 원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한 ‘도미노 이론’이 미국의 월남 지원을 뒷받침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1963년에 월남 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디엠이 축출되고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월남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강력히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1964년 8월 통킹만(灣)에서 월맹군 어뢰정이 2척의 미 해군 구축함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의 군사 타깃에 대한 보복 폭격을 명령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통킹만 결의안(the Gulf of Tonkin Resolution)’을 통과시켜 존슨에게 광범한 전쟁 권한을 부여하였고, 미 공군의 지속적인 대규모 북폭(北爆)이 개시되었다.

1965년 3월 존슨 대통령은 지상군을 월남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6월에 8만 2천명의 전투병을 월남에 보냈다. 이후 1966년에는 10만 명이 추가 파견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태국·호주·뉴질랜드 등이 소규모이긴 하나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1965년 국군 파병을 시작하여, 비둘기 부대 및 십자성 부대(공병·군수), 청룡(해병), 맹호(육군), 백마(육군) 등의 전투 부대를 파병하였다. 1973년 휴전까지 총 32만 명의 국군이 파병되었고, 전사자는 약 5천명, 부상자 약 1만 명이 발생하였다.

3. 전쟁의 격화와 ‘구정 공세(Tet Offensive)’

베트남 전쟁은 보통 전쟁이 그러하듯 전선(戰線)의 진퇴로 승패가 결정되는 정규 전쟁이 아니라, 월남 내 베트콩과의 게릴라전을 수행함과 동시에 월맹에 대한 미국의 대대적인 폭격이 병행되는 소모전 형태로 전개되었다. B-52 폭격기 등에 의한 대규모 북폭과 미 지상군 및 월남군에 의한 베트콩 섬멸 작전에도 불구하고 월맹과 베트콩의 전의(戰意)는 꺾이지 않았다.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은 ‘민족해방전선(NLF)’을 결성하고 월남 정부 타도를 목표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1967년 11월 당시 파월 미군 수는 50만에 육박하였으며, 이미 1만 5천명이 전사하고 11만 명이 부상당하는 인명 피해를 기록하고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승리가 가까웠다는 워싱턴의 자신감과 홍보에도 불구하고, 파월 미 장병들의 정부 불신이 커지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전쟁의 잔혹한 기록들이 전파되면서 반전(反戰) 의식이 퍼져 나갔다. 1967년 10월 펜타곤 앞에서 약 3만 5천명에 달하는 대규모 반전 시위가 펼쳐졌다. 반전론자들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강조하며 미국이 부패한 사이공 독재 정부를 지원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한편 북베트남 월맹 지도부는 미국의 전의를 꺾기 위한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고 있던 중, 1968년 1월 31일 약 7만 명의 월맹군으로 월남 내 100여개의 도시와 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이른 바 ‘구정 공세’다. 미군과 월남군은 이에 신속히 대응하였고 월맹군과 베트콩은 약 절반에 가까운 35,000명이 사살되고 5,800명이 생포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들은 목표 지역을 1~2일간 점령했으나 곧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황(戰況) 보도가 미국 국민을 경악시켰다. 무엇보다 베트콩의 기습 공격으로 사이공 주재 미 대사관이 습격당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목격한 미국민의 충격이 컸다. 끝없는 전쟁 속에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비관적 전망이 미국민들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은 베트남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철군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국민의 지지 기반이 취약한 정권을 보호한다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게릴라전을 정규전 수행 방식으로 성공시킬 수 없다는 교훈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이후 존슨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1968년 3월 ‘북폭 중지’를 명령하고 ‘재선 불출마’를 선언하게 된다.

4. 닉슨, ‘베트남전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 추진

1968년 3월 존슨 대통령의 연설에서 표명된 ‘평화 이니셔티브’는 월맹으로부터의 긍정적인 호응을 얻어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월맹은 그 해 5월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열었으나, 월맹 측이 즉각적인 북폭 중지를 요구한 데 대해 미국 측이 베트콩의 활동 중단을 요구함에 따라 대화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1968년 11월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월남전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69년 1월 백악관에 입성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의 베트남화’라는 새로운 전략을 도입하였는 바, 그 목적은 베트남 전쟁의 모든 군사적 역할과 책임을 월남 정부와 월남군에 양도함으로써 미국의 전쟁 개입을 종식시키려는데 있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월남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의 지지 철회는 미국 사회 내 깊은 분열을 야기시켰다. 이에 따라 닉슨은 미군의 점진적 철수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월남군의 군사력을 증강시킴으로써 월남 국민들이 스스로 방위를 책임지도록 유도하고 미군을 명예롭게 철수하도록 할 방침이었다.

1969년 11월 대국민 연설에서 닉슨은 “자유를 지키는 일은 미국만의 임무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임무”임을 선언하고, 특히 자유를 위협받고 있는 “당사자 국민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존슨 행정부하에서 미국이 월남 전쟁을 “미국화(Americanize)하였다”고 주장하고, “이제 전쟁의 베트남화를 통해 평화를 실현하려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은 미국 내 반전 세력 측의 즉각적인 미군 철수 요구를 거부하고, “명예로운 평화(peace with honor)”를 실현하려는 강한 희망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목적 하에 일시적이나마 닉슨은 오히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예컨대 1970년 4월 베트콩 지원 루트로 간주되던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과 지상군 진입을 지시한 것이다. 닉슨의 이와 같은 베트남 주변지역에 대한 군사작전 강화는 베트남을 안정시켜 베트남화 전략이 뿌리를 내리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판단된다.

닉슨 행정부는 1969년 54만 9천에 이르렀던 미 지상군 규모를 1972년 6만 9천으로 감축시켰다. 이 와중에서 북베트남 월맹군은 닉슨의 방어 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차례의 군사적 공세를 취했고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화 전략에 암운을 던지고 있었다. 1972년 3월 부활절 공세에서 월남군의 패퇴는 주한미군 의존 심화에 따른 빈약한 군사능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1973년 1월 닉슨 행정부는 월맹과의 단독 비밀 평화협상에 착수했으며, 이는 결국 즉각 휴전과 60일 내 미군철수를 거쳐 2년 후 월남의 멸망과 베트남 공산화 통일의 길을 열게 된다.

5. 트럼프의 당선 이후―베트남 전쟁이 한반도에 주는 함의

금년 11월 미국 대통령에 선출된 트럼프 당선자는 그동안 북한에 대해 △김정은을 ‘미치광이’로 규정해 북한 정권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강력한 대북정책을 예고하는가 하면, △김정은과 ‘햄버거’를 함께 먹으며 담판할 수 있다고 발언해 미·북 직접협상 용의를 표명했으며,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100% 한·미 동맹 지지’ 발언으로 동맹 중심 한반도 정책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선거과정에서 안보 ‘무임승차’를 비판하고 방위비 부담 증가를 요구한 점에 비추어, 한반도 정책의 돌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월남을 베트남 전쟁의 당사자로 규정하고 안보 책임을 역설한 닉슨 대통령의 ‘베트남화’ 전략은 트럼프 행정부 대외정책을 뒷받침하는 ‘역외 균형 제한개입(Off-shore Balancing)’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동맹국의 안보 당사자 역할을 강조하며 미 지상군 주둔의 비용과 희생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과 한반도 무력갈등 간에는 차이점도 있으나 유사점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베트콩과 같은 이적 세력이 내부에서 반(反)국가 활동을 공공연히 전개하고 있고, △보수 정권의 부패와 비리로 민심이 이반(離反)하고 있으며, △미국이 현실주의 외교노선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성공은 우리 안보에 치명적 위협이 되고 있다.

물론 △한국군이 월남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전투능력과 사기를 보유하고 있고, △대다수 한국민이 자유민주체제를 지지하고 있는 점, 그리고 △김정은 정권이 민심 이반으로 체제붕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베트남 경우와 차별화되는 점이다.

11월 대선 이후 북핵 문제는 더 이상 유예될 수 없는 미국의 최대 외교·안보 현안으로 부상했다. 내부 안보의식이 확고하지 못하고 분열돼 있으면, 아무리 막강한 미군의 지원이 있어도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월남패망사는 강력히 시사해준다. 동맹을 강화하는 동시에 자체 안보·방위 의지와 능력을 함양할 때 비로소 국가안보가 구축된다는 의미다. 다음 호에서는 미·월맹 간 파리평화협정 결과 미군철수를 거쳐 마침내 월남이 패망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한반도 안보정세와 대한민국의 국가안보에 주는 함의와 교훈을 도출해 보려 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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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북한 2017년 1월호>
비운(悲運)의 월남패망사가 한반도에 주는 교훈(2)

홍관희 (고려대 교수)

고대 희랍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kydides)는 말했다: “강대국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약소국은 그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The strong do what they want to do, while the weak accept what they have to accept).” 힘의 각축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경구(警句)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이 살아남아 번영을 이루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2차 대전 발발 직후 독(獨)·소(蘇)에 의해 분할돼 망국을 피하지 못한 폴란드, 2014년 러시아의 백주(白晝)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 내분과 강대국 개입 속에 비극의 현장이 된 시리아, 러시아의 위협 속에 NATO 가입을 서두르는 지금의 북유럽 나라들 사례가 이를 웅변해준다.

우리가 경제적으론 세계 십 수위권 강소국일지 모르나, 안보적으론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채 분단되어 북한의 핵위협에 노출된 약소국임을 부정 못한다. 내부 분열과 동맹 붕괴로 망국의 비운을 피하지 못한 월남패망사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어야 한다.

1. “베트남전의 베트남화”와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 체결

1969년 1월 취임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 독트린을 공식화하면서, 남베트남(월남)군의 역할을 증대시키고 미 지상군을  철수하는 대신 해·공군에 의한 폭격을 강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을 앞세워 파리에서 베트남평화협정을 본격 추진했다. 평화회담은 당시 키신저 보좌관(후에 국무장관)과 북베트남(월맹) 측의 레둑토 정치국원 간의 비밀 회담으로 시작되어 협정 초안이 마련되고, 이를 월남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베트콩)가 추인하는 형식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968년으로부터 1973년까지 약 5년 동안의 회담 내내 교착상태가 지속되었고 회담이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베트콩의 전투행위 중지 및 지위 인정 문제, 북폭 중지 및 미군 철수 등을 둘러싼 견해 차이가 회담을 빈번히 결렬시켰고, 1973년 1월에야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주목되는 것은 키신저와 레둑토 간 1972년 10월 합의된 협정 초안이다. 남베트남에서의 ‘자유선거와 정치개혁’이란 미명하에 사실상 베트콩의 활동을 인정하는 내용이 담긴 미국-월맹 양자 협정 초안에 당시 월남 대통령이던 티우는 격노하였고, 이 협정이 ‘베트남 공산화’에의 길을 열 것임을 확신한 그는 협정 승인을 거부하였다. 티우는 확고한 반공주의자로서 월맹의 군사적 음모가 숨겨진 파리평화협정의 위험성을 인식했던 듯하다.

닉슨 대통령은 티우 대통령을 설득하고 안심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만약 월맹이 협정을 위반할 경우 북폭(北爆)을 재개할 것이며, 미국은 “월남 편에 설 것”임을 티우에게 보낸 서한에서 분명히 밝혔다. 아울러,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군사원조를 티우 정부에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마침내 1973년 1월 15일 티우 정부가 마지못해 파리협정을 받아들였고, 12일 간의 추가 협상 끝에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이 4자 곧 미국·월맹·월남·베트콩 간에 체결되었다.

2. 파리평화협정의 주요 내용

파리에서 조인된 베트남 평화협정의 정식 명칭은 「베트남에 있어서의 전쟁 종료 및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Ending the War and Restoring Peace in Vietnam」이다. 베트남 평화협정은 미국과 월맹이 가(假)조인(1973.1.23.)한 후, 미국·월맹·월남·베트콩의 4 당사자가 조인(1973.1.27.)하는 이중 조인 형식을 따랐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남북 베트남 군은 1973년 1월 27일 24:00(GMT)를 기해 현 위치에서의 휴전을 실시한다.

(나) 휴전 이후 미군은 60일 이내에 전면 철수한다. 동시에 양측은 전쟁 포로를 모두 석방한다.

(다) 월남 정부와 베트콩 양측은 ‘정치적 해결’을 통해 월남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결정을 허용해야 한다. (월맹은 일관되게 남베트남에 월남정부와 베트콩 간 연합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라) 베트남 통일은 “평화적 방법에 의해 단계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마) 평화협정의 국제적 보장을 위해 군사공동위원회와 국제감시통제위원회를 설치하고, 12개국이 참가하는 국제회의를 개최한다.

그러나 상기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정은 체결 이후 준수되지 못했다. 협정 위반은 월맹 측에 의해 수시로 일어났다. 특히 월맹군과 베트콩은 점차적으로 베트남 남부에 대한 무력 공격을 재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975년 봄 “호지명 작전”에 의한 사이공 함락으로 이어졌다.

파리평화협정의 두 주역은 키신저와 레둑토였다. 두 사람에게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이 수여되었으나, 월맹의 레둑토는 수상(受賞)을 거부하였다. 그는 수상 거부 이유로 “미국과 월남이 협정을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3. 파리평화협정의 문제점과 북한의 ‘미·북 평화협정’ 제의

파리평화협정이 갖는 문제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평화협정 문안이 월남을 배제시킨 가운데 미국과 월맹 간 비밀협상에 의해 작성되어, 월남의 핵심 안보 이익이 반영되지 못했다. 둘째, 협정은 남베트남에 2개의 주권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무력분쟁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잉태하고 있었다. 협정의 4 당사자 중에서 미국과 월맹은 ‘정부’로 명기되고, 월남과 베트콩(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은 남베트남 지역 내의 두 ‘당사자’로 명기되어 어느 실체가 남베트남을 정식으로 대표하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셋째, 협정은 남베트남 주둔 월맹군(15개 사단, 145,000명)의 지위 문제를 월남과 베트콩 간 합의에 의해 결정하도록 규정했으나, 양자는 협정에 규정된 90일 이내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이는 월맹군의 남베트남 주둔을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월맹군의 1975년 무력침공의 길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베트남평화협정」은 베트남의 평화를 보장해 준 것이 아니라, 월남의 몰락을 초래하고 미군 철수를 정당화해주는 구실이 되었다. 미군이 철수함으로써 인도차이나 반도의 군사균형이 붕괴되었고, 공산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베트남 공산화가 북한의 대남전략에 미친 영향 또한 심대하다. 북한은 원래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었다. 김일성은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조건으로 하는 ‘북남평화협정’을 제의하여, ‘先미군철수→後평화협정 체결’ 도식을 공식화한 바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상황을 주시하던 중 1974년 3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미합중국 국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미·북 평화협정’ 체결을 돌연 제의하였다.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 후 미군을 철수시킨 베트남의 경험에서 힌트를 얻어 한반도 평화의 ”실질적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라는 논리 하에 “先평화협정 체결→後미군철수”를 주장한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북한은 평화협정이 미국과 단독으로 체결돼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남한 내 종북 단체들 역시 이에 부응하여 “주한미군 없는 한반도 평화체제” 선동을 지속하고 있다.

4. 월남 패망의 원인

월남 패망의 가장 큰 원인은 내부 분열과 부패다. 티우 정부는 호지명 세력에 비해 정통성이 취약한 데다 ‘반전평화’ 무드에 젖어 안보 불감증이 심각했으며, 부패와 비리가 만연해 있었다. 이에 비해 호지명은 항불(抗佛)·항일(抗日) 독립투쟁의 명성으로 전국적 존경심을 획득했으며, 내부 신뢰와 단결로 집단지도체제를 이루어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다. 여기에 ‘민족’을 내세워 월남을 교란시키는데 성공했으며, 남베트남 내 친북 무장 세력인 베트콩의 존재 역시 월남 패망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미국이 평화협정을 신속히 이루려는 욕심에서 미군을 대체(代替)할 월남군이 충분히 육성되고 훈련을 받기 전에 성급하게 미군철수를 단행한 점도 주요 원인이다. 월남군은 1975~76년 기간에 미군의 지원 아래 충분한 군사훈련을 이수받기로 예정돼 있었다. 이 소식은 북베트남 측에 알려졌고, 이를 알게 된 월맹 정부가 1975년 전격 침략을 감행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파리협정 체결 이후 닉슨 행정부는 월남에 대한 군사원조와 지원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주된 요인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취약해진 닉슨 행정부가 정책 추동력을 상실한 데다 반전 여론을 등에 업은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 후 월남군은 심각한 무기·실탄·원유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미국이 남겨준 우수한 무기들 곧 탱크·비행기 등도 쓸모없게 되었다고 한다.

미 의회는 닉슨 행정부가 재개한 북폭의 중지를 결의했고, 월남군이 패퇴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닉슨 행정부가 월남에게 약속한 모든 방위 공약을 폐기시켰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레어드(Laird)는 월남 패망을 가져 온 의회의 약속 불이행을 강도 높게 비난하기도 했다.

반면에 월맹군은 소련과 중공(中共)으로부터 전폭적인 군사협력 및 무기 공급 지원을 받고 있었다. 약 30만의 중국 인민해방군도 월맹 편에서 싸우고 있었다. 미국이 파리협정 체결을 위해 월맹 측에 경제 원조를 제공하기로 비밀 약속을 했다는 논란도 일었다. 당시 키신저 대표를 수행한 협상팀은 후일 “의회의 승인을 전제로” 미국이 그러한 지원 의사를 월맹 측에 전달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의회의 반대로 지원은 실행되지 못했다.

5. 한반도에 주는 교훈

최근 김정은 3대 세습정권이 초기의 정치 불안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분석이 늘고 있다. 장마당 수가 200에서 400여개로 확산되면서 민생 문제가 80%선까지 해결되고, 권력 엘리트의 이반(離反)을 잔혹한 공포정치로 억누르는 상황이다. 체제 붕괴론이 아직도 유효하나, 중국의 은밀한 지원으로 최악의 국면은 벗어나는 분위기다. 남한에 대해서는 사이버 해킹이나 청와대 습격 훈련 등 다각도의 도발 카드와 심리전을 구사하고 있다.

한편 북한이 북베트남과 다른 점은 권력의 정통성이 부재(不在)하고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과 달리, 해방 이후 우리의 항일 주체 세력은 거의 남한으로 집결했다. 북한이 김일성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항일’을 내세우나, 관제사학(官制史學)의 날조에 의한 것임이 사료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남북 체제경쟁에서 결국 ‘시간은 한국편’이라는 판단이 나오는 배경이다.

다만 우리 사회의 내부 분열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THAAD 배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국정교과서 문제 등 핵심 현안에 대해 정치권 일부의 반발이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는 어떤 전쟁보다 낫다”는 등 안보를 외면한 평화 담론이 횡행하고 있다.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에 의해 무너진 것”이라는 이대용 전 월남 공사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 동향에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은 패권안정론에 입각해 적극 개입과 ‘안보 우산’ 정책을 펴다가도 역부족이라고 판단될 때는 언제나 현실주의 내지 고립주의로 선회하곤 한다. 여기서 ‘역부족’이란 미국으로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당사국 사정 또는 주변 안보환경 등으로 동맹에 대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미 추진되고 있는 주한미군에의 THAAD 배치가 ‘되돌림’ 당한다면, 미국의 한국에 대한 동맹 신뢰도는 급격히 추락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원하지 않는 곳에 주둔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해외주둔 원칙이 되살아날 지도 모른다.

6. 향후의 안보정책 과제

월남패망사는 우리에게 내부 단합과 국방태세 확립 및 동맹 강화가 안보 과제의 핵심임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평화협정 체결 후 2년 만에 월남 패망이 그토록 신속하게 다가올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월남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봤던 사람들도 적어도 5~10년은 월남 정부가 존속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대내외 모순이 축적되면서, 비극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원리를 새삼 깨우치게 된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안보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안보 공약이 100%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베트남 경우를 통해 재확인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우리 격언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미국 대선 이후 트럼프 당선자의 대중(對中)·대북(對北) 정책 방향이 가시화되고 있다. 트럼프-차이잉원(蔡英文) 전화 통화에서 볼 수 있듯 대만을 중국 압박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대담성이 엿보이는 가운데, 그 여파로 북한 문제가 중국의 대미(對美) 지렛대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중 패권 경쟁이 새로운 국제질서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아가면서, 한국은 미국과의 ‘글로벌 동맹’ 차원에서의 ‘역할 증대’ 압박을 받게 될 것이 확실시된다. 내부 혼란과 정쟁 틈에서 외교·안보·대북 정책의 확고한 노선과 입장을 정립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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